사는 이야기

기다림의 나라

O.K 2022. 6. 1. 16:40

인도네시아에서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으면 많이 힘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오래 사신분들은 이골이 났겠지만, 저도 이골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같이 사건이 겹치는 날이면 멘탈이 많이 힘들어집니다.

오늘 아는 현지인과 저녁을 먹기로하고 낮에 일찌감치 은행일을 보러 나갔습니다. 은행일은 작년 말부터 주구장창 메시지가 오는 BCA은행 카드를 바꾸기 위해서 였습니다.

기존 BCA카드는 사용할수 없으니 칩이 박힌 카드로 바꾸라는 거였죠. 카드를 바꾸려고 세 번이나 BCA은행에 갔었지만, 20분 정도 대기하면서 내 대기표까지 얼마나 걸릴까 계산을 해보면 도대체 답이 안 나와서 그냥 나와 버리곤 했습니다. 한 명 처리하는데 20분 정도씩 걸리더군요. 카운터가 네다섯 개가 있지만 실제로 열일하는 직원은 두 명 정도. 내 대기표까지는 아직 10명도 넘게 남아 있으니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답이 안 나오는 거죠.

 

그래서 카드가 중지될 거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썼지만 언젠가부터 정말로 막히더군요. 오늘은 반드시 참고 견디어 카드를 새로 발급받겠다 맘먹고 좀 큰 BCA 지점에 갔습니다. 먼저 온 대기자들이 있었으니 뭐든지 느린 인도네시아에서 50분 기다린 거는 화도 나지 않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됐습니다. 지네 직불카드를 새 걸로 교체하는데 주소를 묻고, 어머니 성함을 묻고, NPWP(세금납부번호)를 묻더라고요. 그리고 뭔가를 한참 키보드로 입력하더니 통장을 기계에 넣었다 뺐다 합니다. 통장과 카드가 두 개씩이라 오래 걸리는 거겠지.

 

"통장을 한 번도 안 찍었네요?"

"네. 인터넷 뱅킹이랑 카드만 사용해서 통장은 안 씁니다."

그리고 여권을 달라고 하더니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다가 여권 싸인과 통장 싸인이 다르다고 난색을 표하는 겁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옵니다. 여기서 성질내고 나가봐야 나만 손해니(벌써 1시간 넘게 인내하고 있으니까요) 좀 만 더 참자. 설명을 했습니다. 그 여권은 새 여권이라서 예전 여권과 싸인이 다른 거다. 그랬더니 싸인이 다르면 새 카드 발급이 곤란하다고 그럽니다.

 

아아악! 그럼 내가 지금 한 시간 넘게 뭘 한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직원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의 싸인만 사용하냐, 싸인은 얼마든지 새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한국에서는 싸인을 많이 안 쓰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직원은 여전히 난색을 표하면서 예전 여권을 가져올 수 없냐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불편한 기색을 표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어떤 외국인이 이름이 다 같은 통장, 거주증, 여권, 개인세금번호, 운전면허증을 다 소지하고 사용하던 카드 재발급 사기를 치겠냐. 그 싸인이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여권에 싸인을 추가로 하겠다."

 

여권에 싸인이 두 개가 들어가면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분명 내 성격상 다시 이렇게 기다려서 카드를 새로 발급받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BCA가 가장 편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기에 끝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여권의 싸인란 옆에 기존 싸인을 추가함으로써 다시 재발급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금방 끝날까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인도네시아를 무시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시작인 겁니다. 싸인을 추가로 했는데도 뭔가 찝찝한지 계속해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거주증을 보더니 왜 세금 번호의 회사명과 거주증 회사명이 다르냐고 묻습니다. "회사를 옮겼어요."

통장 개설 당시 주소와 지금 주소가 다른데 맞느냐. "이사한 지 오래됐슴다."

매니저인지 뭔지 상급자와 잠시 얘기를 나누고 오더니 얼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습니다. "네. 찍으세요."

얼굴에 미소는 사라지고 당장이라도 욕을 퍼부을 것 같은 아우라를 내뿜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말은 없어지고 일처리가 갑자기 빨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저것 싸인을 하라고 합니다. 예전 싸인으로 하라고 충고도 합니다.

 

그렇게 조용히 30분 정도를

징징징 프린트.

싸인.

위이잉 복사.

비번 입력.

다시 반복 ↑

드디어 새 카드가 발급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넘었습니다. 그래도 큰일 하나 처리했다는 기분에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저녁 6시 약속을 위해서 쇼핑몰로 출발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차가 막히지만 보통 오후 3시부터 러시아워 급으로 차가 막히므로 5Km 기준으로 1시간을 잡고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비가 오길래 30분을 더 일찍 움직였고 결국 약속시간보다 45분 일찍 도착해 버렸습니다. 그냥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일찌감치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내리던 비는 점점 더 거세져서 엄청 쏟아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고무줄 시간을 생각하면 이 사람은 백퍼 늦겠구나 싶었죠. 아니나 다를까 6시 정각에 WhatsApp이 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좀 늦겠다. 

 

그리고 이 사람은 7시 30분에 나타났습니다.

 

민따 마아프(죄송합니다), 마쯧 스깔리(차가 많이 막히네요).

 

"띠닥 아빠 아빠(괜찮아요)"